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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 Of Fame] 루 브록
| 2003·01·07 01:35 | HIT : 7,127 | VOTE : 778
포지션 / 투타 : 좌익수 / 좌투좌타
생년월일 : 1939년 6월 18일
현역기간 : 1961 - 1979년
명예의 전당 헌액년도 : 1985년
득표율 : 79.75 % (395표 중 315표 획득)


세기의 도루왕

여러분은 '도루'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선수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대부분의 팬들은 리키 헨더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자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년 전에 팬들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그 답변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당시의 메이저리그 팬들은 헨더슨이 아닌 다른 선수의 이름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이름은 바로 루 브록이었을 것이다. 브록은 헨더슨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메이저리그 최다도루 기록의 보유자였다. 그가 기록한 938개의 도루는 1991년까지 메이저리그 기록이었으며 아직도 내셔널리그에서는 그보다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나오고 있지 않고 있다.

모리 윌스에 의해 도루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후 1960년대와 1970년대, 등장한 수많은 발빠른 선수들 가운데 브록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베이스 위에서 어느 누구보다 빠른 선수였으며 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인 래리 보와가 "누구나 브록이 루상에 나가면 뛴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팀들은 그를 막는데 항상 실패하곤 했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브록이 단순히 발만 빠른 선수였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투고타저가 극에 달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활동했으면서도 8번이나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 3023개의 안타를 기록해 당당히 3000안타 클럽에 그 이름을 올려놓은 뛰어난 타자였다.

또한 3번의 월드시리즈에서 .391 의 타율과 4개의 홈런, 13타점, 14도루를 기록했을 정도로 큰 경기에 강한 선수였다. 그가 월드시리즈에서 기록한 .391 의 통산타율은 월드시리즈에서 70타수 이상 소화한 선수들 가운데 역대 1위의 기록이다. 타석에서 그리고 베이스 위에서 브록은 최고의 선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공격시에는 상대팀의 골칫거리였지만 수비시에는 오히려 소속팀의 골칫거리였다. 브록의 수비는 거의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선수들이 보여준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는 7시즌 연속으로 내셔널리그 외야수 부문 최다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수비 실력이 그의 눈부신 공격력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뛰는 야구의 부활

루이스 클락 브록은 1939년 6월 18일, 아칸소주의 엘도라도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황금의 도시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브록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 곧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그는 루이지애나주의 농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당시의 대부분의 흑인들처럼 브록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빠른 발과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었다. 고교 시절, 그는 야구와 농구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고, 그 덕분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때이던 1958년, 브록은 대학리그에서 무려 .645 의 타율을 기록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59년에는 시카고에서 벌어진 팬암 대회에 미국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한 브록은 시카고 컵스와 3만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 시즌에 마이너리그의 세인트크라우드 팀에서 그는 .361 의 타율과 181안타, 117득점을 기록해 자신이 마이너리그에 있을 수준의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과시했으며 결국 컵스는 9월에 브록을 메이저리그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62년부터 그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시즌은 브록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뜻깊은 해였지만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시즌이었다. 1920년대 이전에는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이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로 평가받았었다. 당시의 야구는 발빠른 1번타자의 출루에 이은 2루 도루, 그 이후에 번트나 안타, 희생타 등으로 득점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베이브 루스의 등장 이후 감독과 팬들은 위험부담이 높은 도루보다는 파워있는 타자들의 한방을 더 기대하게 되었다. 홈런으로 쉽게 득점할 수 있다면 굳이 위험부담이 큰 도루를 시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때문에 도루의 중요성은 감소해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도루는 야구의 중요한 공격수단의 하나라는 위치를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자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높아진 마운드로 인해 예전처럼 한방에 의해 대량득점을 노리는 야구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워졌다. 그러한 와중에 막강한 마운드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타력은 빈약했던 LA 다저스에 모리 윌스라는 선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그다지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빠른 발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62년 시즌, 윌스는 타이 캅이 1915년 시즌에 기록했던, 영원히 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96개의 도루 기록을 뛰어넘어 무려 104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NL MVP 에 올랐다. 윌스가 기록한 104개의 도루는 사람들에게 바로 전년도에 로저 매리스가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깬 것보다 더 큰 충격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분기점으로 해서 도루는 다시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기술 중 하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도루의 대명사

브록은 1964년 시즌 중반까지 컵스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성적은 평범했다. 윌스의 등장으로 뛰는 야구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도 도루는 많은 감독들이 선호하는 공격방식은 아니었고, 때문에 컵스에서 브록은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64년 6월 15일, 각각 2명의 투수와 1명의 외야수로 이루어진 3 : 3 트레이드에 의해 브록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니폼을 입은 이후부터 그가 가진 잠재력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디널스의 감독이었던 자니 킨과 후임 레드 숀딘스트 감독은 브록이 가진 능력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당시의 카디널스가 타력보다는 투수력에 강점을 가진 팀이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카디널스에서 브록은 마음껏 달릴 수 있었고, 브록의 현란한 주루 플레이는 다른 팀들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1964년, 트레이드 이후 카디널스에서 103경기에 출전한 브록은 .348 의 고타율과 33도루, 81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그는 7차전에서 3점 홈런을 터뜨린 것을 비롯 3할의 타율로 맹활약, 카디널스가 뉴욕 양키스를 꺾고, 18년만에 월드시리즈를 차지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다음 시즌인 1965년, 카디널스는 투수진의 붕괴로 7위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지만 브록의 활약은 여전했다. 그는 182개의 안타와 107득점을 기록했고, 도루는 63개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시즌에 무려 94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윌스의 벽에 가로막혀 도루왕 타이틀을 따내는데는 실패했다. 1966년 시즌에도 카디널스의 부진은 계속되었지만 브록은 74개의 도루로 윌스를 제치고, 처음으로 내셔널리그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후 1974년까지 그가 도루왕 타이틀을 빼앗겼던 것은 1970년, 단 1번 밖에 없었고, 이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100득점 이상, 190안타 이상을 기록했다.

1967년 시즌, 숀딘스트 감독이 이끄는 카디널스는 지난 2년간의 부진을 극복하고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에이스 밥 깁슨의 여전한 활약과 떠오르는 신성 스티브 칼튼 등 마운드의 힘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이적해 온 거포 올란도 세페다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지만 브록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는 자신의 최고기록인 21홈런과 206안타를 기록했으며 113득점으로 내셔널리그 득점 1위에 올랐다. 그리고 52개의 도루 역시 리그 1위의 기록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그는 .414 의 타율과 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팀이 3년만에 월드시리즈를 다시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1968년 시즌, 브록은 슬럼프에도 불구하고 내셔널리그 도루왕을 3연패하는데 성공했으며 92득점과 184안타를 기록해 팀이 내셔널리그를 2연패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도 무려 .464 의 타율과 2개의 홈런, 7도루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카디널스는 결국 3승 4패로 패배하고 말았다.

1969년 시즌, 브록의 나이는 30살이 넘었지만 실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타격은 더욱 정교해졌다. 1969년까지 브록이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던 것은 단 1번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의 좋지 않은 선구안 때문이었다. 브록은 당시 내셔널리그 최고의 1번타자이기는 했지만 선구안에 있어서는 낙제점에 가까운 선수여서 매년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30대에 접어들자 삼진 숫자는 줄어들었고, 볼넷 숫자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는 1970년에서 1976년까지 .297 에 그친 1973년 시즌을 제외하고는 매년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1974년 시즌, 보통 선수들이라면 체력의 한계를 느낄만한 35살의 나이였지만 브록의 실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시즌 초부터 '나가면 뛴다' 라고 했을 만큼 그의 도루 페이스는 절정이었고, 결국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9월 10일, 윌스가 1962년 시즌에 기록한 104개의 단일시즌 최다도루 기록을 경신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기록한 105번째의 도루는 46년만에 깨진 내셔널리그 통산 최다도루 기록이기도 했는데, 1910, 20년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전설적인 도루왕이었던 맥스 커레이의 내셔널리그 기록(738도루)을 경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는 모두 118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것은 1982년, 리키 헨더슨에 의해 깨어지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도루 기록이었으며 (19세기에 내셔널리그가 아닌 다른 리그에서 기록한 기록은 제외) 아직까지도 내셔널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시즌에 브록은 NL MVP 에 강력하게 도전했으나 21홈런과 111타점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끈 LA 다저스의 스티브 가비에게 아깝게 밀려 MVP 투표에서 2위에 그쳤다.

1975년 시즌에도 브록은 56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나 다저스의 데이비 롭스, 신시내티 레즈의 조 모건과 같은 신예들에게 밀려 12년만에 내셔널리그 도루부문에서 2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8월 24일에 800번째 도루를 성공시킴으로서 타이 캅 이후 최초로 8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1976년 시즌에도 그는 56개의 도루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37살의 나이로 인한 체력저하로 더 이상 도루왕 타이틀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1977년 시즌, 브록은 38살의 노장이었지만 여전히 빠른 발과 노련한 주루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1976년까지 기록한 도루 숫자는 865개로 캅의 메이저리그 기록에 불과 27개 차이로 접근해 있었다. 기록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고, 예상대로 브록은 1977년 8월 29일, 통산 893도루를 기록함으로서 49년만에 새로운 메이저리그 통산도루 기록을 작성했다. 드디어 브록이 역사상 최고의 도루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1978년 시즌,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진 브록은 데뷔 후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타율은 .221 에 그쳤고, 트레이드 마크인 도루도 17개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으나 브록은 떠밀리듯 은퇴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은퇴를 보류했다. 그리고 맞이한 1979년 시즌, 브록의 나이는 40살이었다. 그러나 1978년 최악의 부진을 맛본 브록은 놀라운 정신력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1979년, 그는 .304 의 타율을 기록했고, 8월 13일에는 컵스의 데니스 램프를 상대로 3000번째 안타를 기록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던 스탠 뮤지얼과 같은 3000안타 클럽의 멤버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시즌을 마칠 때까지 23개의 안타를 추가한 후 그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19년의 메이저리그 경력을 마감했다. 이때까지 그가 기록한 도루 숫자는 938개였다.

브록은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모범적인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미 1965년부터 세인트루이스에 '루 브록 소년 클럽 (Lou Brock Boys' Club)' 을 조직해 청소년 선도에 힘썼고, 그 공로로 1975년에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록이 은퇴한 후 카디널스는 그의 등번호 20번을 영구결번으로 선정했고, 브록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격을 얻은 첫 해인 1985년, 79.75 % 의 지지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후 그는 'Brock World Products International' 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며 메이저리그와 청소년 선도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Written by ung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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